해질녘, 낡은 아파트 단지는 핏빛 노을에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가는 중이었다. 20층 남짓한 낡은 콘크리트 건물들은 마치 늙은 병사들처럼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지만, 그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불안하게 흔들렸다. 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희망의 땅이었다. 반도체 호황에 맞춰 지어진 아파트들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강뷰’ 아파트에 대한 욕망을 불태웠다.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지금은 싸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글로벌 경제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가 덮쳐왔고,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회사는 M&A라는 칼날 앞에 놓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빚더미에 허덕이며 하나둘씩 떠나갔다. 텅 빈 놀이터에는 녹슨 미끄럼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버려진 희망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텅 빈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따뜻한 보금자리였을 그곳은 이제 텅 빈 눈동자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곧 들이닥칠 모래폭풍을 예감하는 듯.